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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잔지바르 체주마을 2기 11학번 김송이 우리나라는 새마을 운동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세계 최초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제는 무상 원조가 아닌 '근면, 자조, 협동'을 모티브로 주민과 더불어 마을을 발전시키기 위해 한국에서는 수혜국에 민간 외교관으로 새마을 리더 해외 봉사단을 파견하였고 나는 4기로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발령을 받았다. 우리는 새마을 리더 봉사단이 되기 위하여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고 교육기간 중에 알게 되었다. 봉사에 대한 개념, 새마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 그리고 전공자들에게 기대가 높다는 것. 전공자로써 새마을 리더가 되었다는 것은 부담과 설렘이 교차하는 느낌이었다. 출국할 때 왼쪽 가슴에 태극기를 달았다. 민간 외교관의 첫 발걸음이었다. 내가 14개월간 활동하는 곳은 인도양의 흑진주라고 불리는 탄자니아의 작은 섬 잔지바르이다. 과거에 노예를 사고파는 곳이었고 오랜 식민지 생활로 슬픈 역사가 남아있는 섬이다. 그러나 유네스코로 등록 될 만큼 잘 보존 된 스톤타운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에메랄드 빛 바다를 만날 수 있는, 아프리카에서는 낙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곳에서 내가 맡은 사업은 새마을 사업의 꽃, 소득증대 사업이다. 눈에 보이는 소득을 통해 마을 주민들에게 ‘할 수 있다’라는 의식을 일깨워 주는 중요한 사업이다. 내가 발령 받은 마을인 체주는 망고나무가 많은 마을이었는데 이 망고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시작 된 사업이 망고 건조 사업이었다. 나는 2기로 마을에 발령받아 그 사업을 이어 받았고 그 때부터 마을 주민들의 생업에 관여하며 동고동락을 함께 하게 되었다. 망고 먹을 생각에 설레며 시작했던 사업은 생각보다는 만만치 않았다. 아프리카 초원 한 가운데에서 물도 전기도 없이 식품사업이라니. 하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사업은 창의적이다. 아직 경험이 부족해 일처리가 늘 순탄치는 않았지만 배운 것을 활용하는 순간도 있었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시야가 넓어졌다. 함께 일하는 23명의 탄자니아 주민들은 나를 보스라고 생각한다. 나보다 한참 나이도 많은 사람들이 일하다 말고 쪼르르 달려와 누가 일 안한다고 일러바치거나 비밀얘기를 귓속에 속닥거리는 모습을 보면 나이도 잊고 그 사람들이 마냥 귀엽다. 그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외국 여자에게 생업을 맡기고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항상 감사함을 느끼고 이들을 통해 힘과 열정을 얻는다. 가끔은 마을 주민들 때문에 속이 상해 몰래 눈물을 훔칠 때도 있었지만 좋고 나빴던 기억 모두가 있기에 그들과 더 끈끈한 관계가 형성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들이 나를 제일 곤란하게 하는 것은 ‘한국 돌아가면 언제 다시와’ 라는 질문이다. 새로운 경험과 내적성장. 미지의 땅 아프리카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언어 습득. 타지에서 내가 주관하는 사업. 1년간 민간 외교관으로써의 삶. 정말 매력적인 생활이었고 임기동안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14개월이라는 시간과 아프리카라는 대륙에 대한 두려움이 내가 새마을 리더로써 해외봉사를 가는 것에 발목을 잡았지만, 그 때 발목을 잡았던 것들이 오히려 지금의 내게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여기서 지낸 1년 동안 나의 가치관이 바뀌고 내 진로에 대해서도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 길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이 더 생겼고, 탄자니아에서의 내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국제 사회에 공헌 할 수 있는 내가 되고 싶다. 내게 주어진 이 기회에 감사하고 새마을 봉사단원으로 있었던 모든 시간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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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ENDE PAMOJA SAEMAUL!! 11학번 김세진 예전부터 아프리카라는 대륙은 나에게 있어서 미지의 세계, 동물들이 자유롭게 뛰어노는 평화로운 곳으로 생각되는 곳이었다. 내가 아프리카와 인연이 있을 줄이야!! 우연히 학과 게시판을 보던 중 눈에 띄는 포스터가 있었다. ‘새마을 해외 봉사단원 모집’ 이 포스터를 보고 난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수님들께 자문을 구하였고 흔쾌히 많은 도움을 주셨다. 탄자니아에 파견된지 1년이 지난 지금, 지난날을 되돌아 봤을 때 누군가 나에게 “새마을이란?” 이라고 묻는다면 “터닝 포인트”라고 대답할 것 같다. 새마을이 왜 나에게 터닝 포인트일까, 물론 나의 전공이 새마을 국제개발학과 이지만 실전경험이 부족한건 당연한 일이였다. 실제로 따지고 본다면 당시 새마을은 나에게 책에서 배운 이론일 뿐이었다. 하지만 탄자니아에 파견되고 나서 새마을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배우게 해준 주역이었다. 과거 한국에게도 새마을은 경제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터닝 포인트였고 현재 나에게도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준 것이 새마을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라는 대륙에 맨땅에 헤딩처럼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알리기란 쉽지 않는 일이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외국인이면 당연히 돈이 많을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너희는 돈 많잖아! 우리 좀 도와줘!”라고 하길래 “나 돈 없어, 나 봉사단원일 뿐이야!” 라고 했더니 “너희는 한국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비행기도 타고 차도 타고 다니잖아! 우린 그런거 돈 없어서 못해! 그리고 우린 너희가 입던 옷 입잖아!”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럴 때일수록 나는 “너희가 부지런히 같이 도와서 일하면 돈이 생기고, 그 돈으로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고 그럼 너희는 부자가 될 수 있어! 한국도 이렇게 가난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변했어!”라며 타이르던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를 보고 “Naomba Hela, Naomba Soda" (돈줘!, 음료수줘!) 를 외치던 사람들이 서로 같이 땀흘리며 일하면서 “Twende pamoja!!" (함께하자!) 라고 외치면서 점차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볼 때 마다 행복하고 뿌듯함을 느꼈다. 이제는 현지인들과 함께 현지식과 차이(차)를 마시며 농담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며 사업을 마무리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드디어 한국에 돌아가네!’ 라는 마음과 ‘너무 아쉽다. 좀 더 있고 싶다.’ 라는 마음이 든다. 시원섭섭하다라는 표현을 이럴때 쓰는가 보다. 내가 파견된 마을은 산간지역이고 전기도 없고 물이 귀하여 사업함에 있어 어려움이 많았지만 내가 스와힐리어가 늘때마다 기뻐해주던 마을 주민들의 모습과 코레아, 코레아~ 하면서 따라다니던 아이들, 도와줄게 하면서 함께 일하던 모습들, 처음으로 보았던 개똥벌레와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수많은 별들, 아름다운 자연경관, 사람들의 순박한 미소까지 한국에 가서도 그립고 자주 생각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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